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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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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라이 학살은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육군 병사들이 꽝응아이성 썬미 마을(미라이)에서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초기에는 은폐되었으나, 언론 보도와 사진 공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미라이 학살은 미국 내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고,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등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사회와 국제 사회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들은 기소되었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 외에는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 미라이 학살 현장에는 기념관과 평화 공원이 조성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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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미라이 학살
로마자 표기Tham sat My Lai
다른 이름ソンミ村虐殺事件 (손미 마을 학살 사건), The Mỹ Lai massacre (미라이 학살)
위치베트남 공화국 꽝응아이 성 선틴 현 손미 마을 (현: 베트남 꽝응아이 시 띤케 사)
사건 개요
대상미라이 4 지구 및 미케 4 지구
날짜1968년 3월 16일
시간대(알 수 없음)
유형학살, 전시 성폭력, 고문
발생 장소손미 마을
피해자
사망자미국 육군 발표: 347명 (미케 마을 사망자 제외)
베트남 정부 발표: 504명 (미라이, 미케 마을 전체)
기타 추정: 400명 이상
부상자(알 수 없음)
피해자마을 주민 347~504명
가해자
가해 주체미국군
소속 부대제23보병사단
제11경보병여단, 버커 기동 부대
제20보병연대 제1대대 C중대
제1보병연대 제3대대 A중대
제3보병연대 제4대대 B중대
관련 인물윌리엄 캘리 소위 (3년 복역)
휴 톰슨 주니어, 로렌스 콜번, 글렌 안드레오타
처벌
유죄 판결윌리엄 캘리
유죄 내용계획 살인 (22건), 살인 미수
형량미국에서 종신형 (후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3년 가택 연금으로 감형)
참고 자료
학살 후 모습
학살 후 모습 (미국 육군 사진가 로널드 L. 해벌 촬영)
학살 직전 여성
학살 직전의 손미 마을 여성
추가 정보
동기구정 공세에 따른 베트콩에 대한 미군의 보복
관련 사건베트남 전쟁 중 발생한 대량 학살 사건
참고 자료BBC 뉴스: 전쟁의 이름으로 저지른 살인: 미라이 학살
미 육군 역사 재단: 1968년 3월 16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공동 통신: 손미 마을 학살 40년 추도식

2. 경과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육군 제23보병사단 제11경보병여단 바커기동부대 예하 제20보병연대 제1대대 C중대가 남베트남 꽝아이성 썬띤현 슨미 마을 미라이 마을(꽝아이 성도 북동쪽 13km, 인구 507명)을 공격하여 무저항 민간인 504명[214]을 학살하였다. C중대는 저항을 받지 않았음에도 인근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원래 슨미 마을은 띤케 마을이었으나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개명되었고, 통일 후 복원되었다. 혼다 카츠이치는 라이프지가 현장을 미라이라고 보도했지만 실제 현장은 인근 툭응 부락의 짠니엔 마을과 콜이 부락의 미이호이 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215]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는 헬기 조종사로, 작전지역을 비행하다가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구조 활동을 펼쳤다. 비무장 민간인이 사살당하는 것을 보고 즉시 도움을 요청했으며, 구덩이에 있던 여성과 아이들을 구조하고 헬기로 후송했다. 톰슨 준위의 보고로 찰리 중대에 "살해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62]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 기자의 특종 보도로 미라이 학살이 폭로되었다.[68] 이 사건으로 미국의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진상 규명 결과 26명의 군인이 학살에 관여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68]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과 사면으로 3년 반 동안 가택 연금 후 풀려났다.[68]

2. 1. 배경

미국 육군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투입되었다. 투입 첫 달은 별다른 교전이 없었다. 1968년 3월 중순, 중대원 5명이 부비 트랩에 의해 사망하였다.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이 흩어져 있는 꽝응아이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수중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이 촌락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오런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하였다.[227]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228]

작전 전날 저녁,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손미 지역의 모든 민간인을 남베트남 해방전선이거나 동조자로 간주하라는 작전 개요를 중대원들에게 설명했다. 후일 메디나는 이 작전 계획이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과 병사들은 여성,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고 지시받았다고 진술하였다.[229]

2. 2. 작전

1968년 3월 16일 아침, 찰리 중대는 헬리콥터를 타고 미라이 마을에 진입했지만, 베트콩 등 적군은 발견하지 못했다. 미군은 가옥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마을 중앙에 모은 뒤 자동화기로 학살했다. 1소대는 70~80명,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미라이 4 촌락에서 60~70명을 학살했다. 3소대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했다.[228]

찰리 중대가 작전 완료를 보고하자 4대대가 미케 4 촌락에 도착하여 90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후 이틀 동안 두 대대는 작전 지역의 가옥과 우물을 파괴했다.[230]

2. 3. 헬기 정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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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 조종사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는 작전지역을 비행하다가 노인, 여성, 아동으로 이루어진 비무장 민간인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저항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비무장 여성이 사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톰슨 준위는 곧바로 무선으로 도움을 청하고 그곳에 착륙하여 자신의 헬리콥터에 부상자와 시체를 가능한 실어 옮기겠다고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1소대장 캘리 소위는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228] 톰슨 준위는 파여진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여성과 아이들을 발견했으며 2소대장에게 그들에게 발포할 경우 응사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헬기에 실었다. 톰슨 준위와 동료들은 그들을 실어 나른 뒤 다시 미라이에 돌아와 시체들 속에서 4살이 채 안 돼 보이는 소년을 구할 수 있었다. 1994년 미국은 톰슨에게 장병의 훈장을 수여하였다.[228]

사건 당시 글렌 안드레오타(Glenn Andreotta) 4급 특기병이 기장을 맡고,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가 조종하고 로렌스 콜번(Lawrence Colburn) 4급 특기병이 사수를 맡은 OH-23G 정찰 헬리콥터가 마을 상공을 지나가다가 다수의 사망자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목격하였다. 톰프슨 준사관은 상관에게 보고하고 구조 헬기 파견을 요청하여 생존자를 구출하였으며, 더 이상 폭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C중대를 위협하였다.[214]

톰슨은 11시경 기지로 돌아온 후 상관들에게 학살 사건을 보고했다.[61] 민간인 살해에 대한 그의 주장은 곧 작전의 전체 지휘관인 바커 중령에게 전달되었다. 바커는 작전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부관에게 무전을 보냈다. 그러자 메디나가 찰리 중대에 "살해를 중단하라 – 그만두어라"는 휴전 명령을 내렸다.[62]

2. 4. 폭로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 기자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특종 보도를 했다.[68] 이 보도로 인해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 정부는 진상 규명에 나섰고,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결과 총 26명의 군인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윌리엄 캘리 중위뿐이었다.[68]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68]

윌리엄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을 받고 3년 반 동안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낸 후 사면되었다.[68] 이와는 별개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은 윌리엄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68]

다음은 켄 번즈의 PBS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시리즈에 나오는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3. 원인

미국 육군 23보병 사단, 11여단, 20보병 연대, 1대대,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투입된 후 첫 달은 별다른 교전이 없었으나, 3월 중순 중대원 5명이 부비 트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했고, 미라이를 포함한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고, 오런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했다.[227]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과 가축을 불태우고 농경지와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했다.[228]

작전 전날,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오전 7시까지 남베트남 해방전선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몰아낼 것이라고 작전 개요를 설명했다. 메디나는 후일 이 작전 계획이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했으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과 병사들은 여성,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229]

혼다 카츠이치는 전후 베트남 방문 시 현지 당 위원장으로부터 꽝응아이성이 혁명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전략촌(戦略部落)”으로 지정된 지역으로의 주민 이주가 진행되었고, 다른 현에서는 강제 이주가 완료되었지만, 슨미(Sơn Mỹ)를 포함한 슨틴현(Sơn Tịnh)에서는 주민들의 거부가 강해 미군이 인근에 대한 경고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들었다.[215]

3. 1. 미군의 군사 전략

미군은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오런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하였고,[227]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228] 작전 전날,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남베트남 해방전선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몰아낼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후일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과 병사들은 여성,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229]

조나단 셸(Jonathan Schell)은 미라이 학살이 발생한 베트남 꽝응아이성에서 모든 마을의 최대 70%가 공습과 포격, 특히 네이팜탄 사용으로 파괴되었고, 인구의 40%가 난민이었으며, 민간인 사상자는 연간 5만 명에 달한다고 썼다.[94] 그는 이러한 잔혹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다른 여러 민간인 살해 및 마을 파괴 방법들이 전쟁 수행 방식의 예외가 아닌 규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95]

1970년 5월, 스피디 익스프레스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에 참여했던 한 상병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에게 민간인 살해가 "1968년~69년 동안 매달 미라이와 같은 규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의 기밀 편지를 썼다. 1971년에는 하급 병사들이 군 지도부에 이와 유사한 내용의 편지 두 통을 보냈다는 사실이 기밀 해제된 국가 기록 보관소 문서에서 발견되었다. 이 편지들은 인구 진정 작전 중 민간인 살해가 흔히 발생했으며, 미군 정책이 높은 사상자 수를 강조하여 민간인 사망자가 전투원으로 표시되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한다.[96][97]

3. 2. 인종차별과 적개심

미국 육군 병사들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인에 대해 인종차별적 인식과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미라이 학살의 배경이 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 민간인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고, 여성,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적으로 간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229]

피어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 당시 최소 20명의 베트남 여성과 소녀들이 강간을 당했다. 피해자들의 연령은 10세에서 45세 사이였으며, 이 중 9명은 18세 미만이었다. 성폭행에는 집단 강간과 성고문이 포함되었다.[46] 그러나 미군 병사 중 강간 혐의로 기소된 자는 없었다.[46]

일부 저자들은[109] 미라이 사건에서 하급 인원들에 대한 가벼운 처벌과 고위 관리들을 책임지게 하려는 의지의 부족이 미군 병사들이 베트남 적군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쪽으로 치우치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들이 민간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더라도 말이다. 이는 다시, 닉 터스(Nick Turse)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미라이와 유사한 덜 알려진 학살과 베트남에서 흔한 전쟁범죄의 패턴을 만들었다.[109]

3. 3. 명령 불복종의 어려움

1968년 미라이 학살 당시, 미군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C 중대 분대장이었던 로렌스 라 크로이는 "군대에는 그런 것은 없다. 전투 상황에 들어가서 '아니, 안 갈 거야. 그건 안 할 거야. 그 명령은 따르지 않겠어'라고 말하면, 그들은 나를 벽에 세워놓고 총으로 쏠 것이다."라고 말했다.[112] 이는 명령 불복종이 사실상 불가능한 군대 문화를 보여준다.

윌리엄 캘리 중위는 1969년 9월, 미라이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명령을 받았을 때 왜 그들에게 맞서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상관의 명령을 받는 소위였고, 그 명령을 따랐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말이죠."라고 진술했다.[118][119] 이 진술은 당시 군 내부의 경직된 상명하복 문화를 드러낸다.

4. 사진



학살된 희생자


가옥을 불태우는 모습


미라이에 투입된 미군


가옥을 파괴하는 미군


신원 미상의 베트남 남성


학살당한 베트남 아이


신원 불명의 베트남 여성 시신


5. 진상 은폐 시도

1968년 미군 상층부는 미라이 학살을 은폐하려 했다. 6개월 후, 제11경보병여단 소속 톰 글렌은 크레이턴 에이브람스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미군의 잔혹 행위를 묘사했다.[71]

당시 아메리칼 사단 작전 참모 콜린 파월 중령은 글렌의 편지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파월은 "아메리칼 사단 병사와 베트남 국민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라고 보고했다.[72] 2018년 미 육군 연구는 파월이 글렌의 주장을 조사했지만, 미라이 학살과 관련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72] 파월의 임무 처리는 이후 "은폐"로 묘사되었다.[73]

로버트 맥나마라 지시로 국방부 감찰관은 남베트남 내 잔혹 행위 보도를 조사, 1967년 8월 200페이지 분량 보고서를 완성했다.[42]

제11보병여단 로널드 L. 라이든하우어는 1969년 3월 의원 30명에게 "핑크빌" 사건 조사를 요청했다.[78][75] 그는 찰리 중대 병사들과의 대화로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일"이 있었다고 확신,[77] 미합중국 합동참모본부 의장, 대통령, 의회에 우려를 전했다.[70]

모 우달 의원[80],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에드워드 브룩 상원의원이 라이든하우어 편지에 주목,[81] 우달은 하원 군사위원회에 펜타곤 조사를 촉구했다.[75]

미라이 학살 관련 조사 대상 장교는 14명(장군 2명 포함)이었다. 프랭크 A. 바커 중령, 얼 마이클스 대위, 스티븐 브룩스 중위는 조사 전 사망했다.[129][130][131]

계급이름소속혐의결과
중령(LTC)프랭크 A. 바커바커 특수부대 지휘관미라이 마을 파괴 명령, 헬기 감독1968년 6월 13일 공중 충돌로 사망 (조사 전)[41][121]
대위(CPT)케네스 W. 보트먼포병 정찰관부도덕 행위 보고 불이행기소 취하[129]
소령(MAJ)찰스 C. 캘훈바커 특수부대 작전 장교부도덕 행위 보고 불이행기소 취하[129]
중위(2LT)윌리엄 캘리C중대 제1소대장민간인 102명 고의 살해[122]유죄, 종신형, 1974년 9월 가석방
중령윌리엄 D. 귄 주니어꽝응아이 주 부고문직무 태만, 위증기소 취하[129]
대령(COL)오런 헨더슨제11보병여단장은폐, 위증기소 취하[41]
소장(MG)새뮤얼 W. 코스터제23보병사단장규정 위반, 직무 태만, 은폐기소 취하, 준장 강등, 훈장 박탈[129]
대위유진 M. 코토우크군 정보 장교[124]불구, 폭행무죄[43]
대위데니스 H. 존슨제52군 정보 파견대규정 위반기소 취하[129]
중위제프리 U. 라크로스C중대 제3소대장없음
소령로버트 W. 맥나이트제11여단 작전 장교위증기소 취하[129]
대위어니스트 메디나C중대장중범죄 신고 실패, 살인무죄[126]
대위얼 마이클스[127]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
준장(BG)조지 H. 영 주니어제23보병사단 부사단장은폐, 규정 위반, 직무 태만기소 취하[129]
소령프레데릭 W. 왓케제123항공대대 B중대장규정 위반, 직무 태만기소 취하[129]
대위토머스 K. 윌링햄B중대, 바커 특수부대허위 공문서 작성, 중범죄 신고 실패기소 취하[129]



미군 상층부는 학살을 보고받았으나, 반전 운동을 우려해 은폐했다.

5. 1. 초기 보고서 조작

초기 보고서는 미라이 마을에서 "격렬한 총격전" 중에 "베트콩 128명과 민간인 2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부대의 "뛰어난 활약"을 칭찬했다. 당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잡지는 "미국 보병들이 하루 종일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공산주의자 128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68]

1968년 3월 16일, 5시 뉴스로 알려진 공식 기자 브리핑 자료에는 "오늘 작전에서, 아메리칼 사단 부대는 꽝응아이 시 근처에서 적 128명을 사살했습니다. 헬리콥터 기총 사격과 포병 사격이 하루 종일 지상 부대를 지원했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69]

미라이 사건에 대한 초기 조사는 아메리칼 사단 참모장인 조지 H. 영 준장의 명령에 따라 헨더슨 대령이 수행했다. 헨더슨은 사건에 연루된 여러 병사들을 인터뷰한 후, 4월 말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작전 중 약 20명의 민간인이 우발적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헨더슨의 보고서에 따르면,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는 우발적인 것이었고, 주로 장거리 포격 때문이었다.[70] 당시 군은 여전히 이 사건을 적 전투원 128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군사적 승리로 묘사했다.[26]

처음에는 주민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부대와의 전투”라는 허위 보고가 이루어졌다. 당시 미 육군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는 육군 소속 제이 로버츠(Jay Roberts) 기자와 상의하여 “제지하거나 고발하면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 관계자에게 질문을 받으면 증언하고 사진도 보여주겠지만, 아무런 질문을 받지 않으면 침묵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작전은 대성공”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해벌리는 사건 2주 후 명예 제대했다.[216]

5. 2. 상급 지휘관의 개입

초기 보고서는 미라이 마을에서 "격렬한 총격전" 중에 "베트콩 128명과 민간인 2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부대의 "뛰어난 활약"을 칭찬했다.[68] 당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는 "미국 보병들이 하루 종일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공산주의자 128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68]

5시 뉴스로 알려진 공식 기자 브리핑에서는 "오늘 작전에서, 아메리칼 사단 부대는 꽝응아이 시 근처에서 적 128명을 사살했습니다. 헬리콥터 기총 사격과 포병 사격이 하루 종일 지상 부대를 지원했습니다."라는 내용이 발표되었다.[69]

미라이 사건에 대한 초기 조사는 아메리칼 사단 참모장인 조지 H. 영 준장의 명령에 따라 오런 헨더슨 대령이 수행했다. 헨더슨 대령은 사건에 연루된 여러 병사들을 인터뷰한 후, 4월 말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작전 중 약 20명의 민간인이 우발적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헨더슨의 보고서에 따르면,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는 우발적인 것이었고, 주로 장거리 포격 때문이었다.[70] 당시 군은 여전히 이 사건을 적 전투원 128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군사적 승리로 묘사했다.[26]

6개월 후, 제11경보병여단 소속 톰 글렌은 새로운 MACV 사령관인 크레이턴 에이브람스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미국군의 잔혹 행위를 묘사했다.[71]

당시 아메리칼 사단 작전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콜린 파월 중령은 미라이 사건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던 글렌의 편지를 조사하도록 지시받았다. 파월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아메리칼 사단 병사와 베트남 국민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라고 썼다.[72] 2018년 미 육군의 이 학살에 대한 사례 연구는 파월이 "[글렌] 편지에 묘사된 주장을 조사했습니다. 그는 광범위한 불필요한 살인, 전쟁 범죄 또는 미라이와 관련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지적했다.[72] 파월의 임무 처리 방식은 나중에 일부 관찰자들에 의해 미라이의 잔혹 행위를 "은폐"한 것으로 묘사되었다.[73]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방부 감찰관은 남베트남에서 자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잔혹 행위에 대한 언론 보도를 조사했고, 1967년 8월, 200페이지 분량의 "남베트남에서 미국 군대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잔혹 행위" 보고서가 완성되었다.[42]

제11보병여단 사령부 항공대 소속 로널드 L. 라이든하우어는 1969년 3월 30명의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핑크빌" 사건의 경위를 조사해 줄 것을 간청했다.[78][75] 라이든하우어는 학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없었지만, 사건을 목격하고 일부 경우에는 살인에 가담했던 찰리 중대 병사들과의 자세한 대화를 통해 "다소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77] 그는 육군에서 제대 후 3개월 만에 미합중국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뿐만 아니라 의회에도 자신의 우려를 적어 보냈다.[70]

라이든하우어의 편지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시했지만, 모 우달 의원[80]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에드워드 브룩 상원의원은 예외였다.[81] 우달 의원은 하원 군사위원회가 펜타곤 관리들에게 조사를 촉구하도록 촉구했다.[75]

미라이 학살과 관련하여 총 14명의 장교가 조사를 받았으며, 여기에는 두 명의 장군도 포함되었다. 이들 중 프랭크 A. 바커 중령, 얼 마이클스 대위, 스티븐 브룩스 중위는 조사 시작 전에 사망했다.[129][130][131]

다음은 미라이 학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장교들의 명단이다.

계급이름소속혐의결과
중령(LTC)프랭크 A. 바커바커 특수부대(Task Force Barker) 지휘관미라이 마을 파괴 명령, 헬기에서 포격 및 전투 돌격 감독1968년 6월 13일 베트남에서 공중 충돌로 사망 (조사 시작 전)[41][121]
대위(CPT)케네스 W. 보트먼포병 정찰관부도덕 행위 보고 불이행기소 취하[129]
소령(MAJ)찰스 C. 캘훈바커 특수부대 작전 장교부도덕 행위 보고 불이행기소 취하[129]
중위(2LT)윌리엄 캘리제1대대 제20보병연대 C중대 제1소대 소대장102명의 민간인 고의 살해[122]유죄 판결, 종신형 선고, 1974년 9월 가석방
중령윌리엄 D. 귄 주니어꽝응아이 주 부주 선임 고문/선임 부문 고문직무 태만 및 위증기소 취하[129]
대령(COL)오런 헨더슨제11보병여단 지휘관은폐 및 위증기소 취하[41]
소장(MG)새뮤얼 W. 코스터제23보병사단 사령관합법적인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 직무 태만, 은폐기소 취하, 준장으로 강등, 훈장 박탈[129]
대위유진 M. 코토우크바커 특수부대에 배속된 군 정보 장교[124]불구 및 폭행무죄 판결[43]
대위데니스 H. 존슨제52군 정보 파견대, 바커 특수부대에 배속합법적인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기소 취하[129]
중위제프리 U. 라크로스C중대 제3소대 소대장없음
소령로버트 W. 맥나이트제11여단 작전 장교위증기소 취하[129]
대위어니스트 메디나제1대대 제20보병연대 C중대 중대장중범죄 신고 실패 및 살인무죄 판결[126]
대위얼 마이클스[127]미라이 작전 당시 장교세 달 후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
준장(BG)조지 H. 영 주니어제23보병사단 부사단장은폐 혐의, 합법적인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 직무 태만기소 취하[129]
소령프레데릭 W. 왓케제23보병사단 제123항공대대 B중대 중대장합법적인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과 직무 태만기소 취하[129]
대위토머스 K. 윌링햄제3보병연대 제4대대 B중대, 바커 특수부대에 배속허위 공문서 작성 및 중범죄 신고 실패기소 취하[129]



현장에 있던 여러 미국 군인들은 군 상층부에 이 학살 사건을 보고했지만, 미국 여론을 반전 운동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이유로 군 상층부는 사건을 은폐했다.

6. 군사재판

미라이 학살은 1969년 시모어 허시의 특종 보도로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진상 규명에 나섰고,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총 26명의 군인이 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217][218]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을 받았으며, 3년 반 동안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낸 이후 사면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6. 1. 기소 및 재판

미라이 학살은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1969년 시모어 허시의 특종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진상 규명에 나서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총 26명의 군인이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217][218]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 후 3년 반 동안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다 사면되었다.

1970년 3월 16일, 미 육군 조사위원회는 학살 관련 용의자들에 대한 기소 절차를 시작했다. 보고를 소홀히 한 장교들을 포함해 14명(장군 2명, 영관 8명, 위관 4명)이 직무 태만 및 육군 규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용의자들은 현직에서 해임되었다. 그중 12명은 파면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217]

같은 해 5월 18일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서 시작된 군사재판에서는 이 학살에 가담한 14명이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1971년 3월 29일 선고에서 부대를 지휘했던 캘리 소대장에게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1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캘리 자신도 이후 10년형으로 감형된 후, 3년 후인 1974년 3월 가석방되었다.

캘리에 따르면, 학살 계획은 소탕 작전 실행 전날 결정된 기정사실이며, C중대장인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가 주장한 것이라고 한다. 캘리는 메디나가 "모두 죽여라"로 해석될 수 있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고, 메디나는 "모든 적을 죽여라"고 명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점이 법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메디나 자신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수천 명의 미국인들은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의 행동을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한 애국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6. 2. 캘리 중위의 형량

1970년 5월 18일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서 열린 군사재판[218]에서 미라이 학살 가담자 14명이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1971년 3월 29일 선고에서 윌리엄 캘리 중위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1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217] 이후 캘리 중위는 1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74년 3월 가택 연금 3년 반 만에 가석방되었다.[217]

6. 3. 메디나 대위의 무죄 판결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에 대한 초기 조사는 아메리칼 사단 참모장 조지 H. 영 준장의 명령에 따라 헨더슨 대령이 수행했다. 헨더슨은 사건에 연루된 여러 병사들을 인터뷰한 후, 4월 말 작성한 보고서에서 작전 중 약 20명의 민간인이 우발적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은 여전히 이 사건을 적 전투원 128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군사적 승리로 묘사했다.[70][26]

5시 뉴스로 알려진 공식 기자 브리핑 석판 인쇄 자료에는 "오늘 작전에서, 아메리칼 사단 부대는 꽝응아이 시 근처에서 적 128명을 사살했습니다. 헬리콥터 기총 사격과 포병 사격이 하루 종일 지상 부대를 지원했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69] 초기 보고서는 마을에서 "격렬한 총격전" 중에 "베트콩 128명과 민간인 22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고,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부대의 "뛰어난 활약"을 칭찬했다. 당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잡지는 "미국 보병들이 하루 종일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공산주의자 128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68]

1970년 3월 16일, 미 육군 조사위원회는 학살 사건 조사 후 상관에게 보고를 소홀히 한 장교들을 포함해 14명(장군 2명, 영관 8명, 위관 4명)을 직무 태만 및 육군 규정 위반으로 기소했다. 용의자들은 현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중 12명은 파면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217]

같은 해 5월 18일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서 시작된 군사재판[218]에서는 이 학살에 가담한 14명이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1971년 3월 29일 선고에서 부대를 지휘했던 칼리 소대장에게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1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칼리 자신도 이후 10년형으로 감형된 후, 3년 후인 1974년 3월 가석방되었다. 육군의 이러한 조치는 전 세계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칼리에 따르면, 학살 계획은 소탕 작전 실행 전날 결정된 기정사실이며, C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가 주장한 것이다. 칼리(칼리 소대장)는 메디나가 "모두 죽여라"로 해석될 수 있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고, 메디나(메디나 대위)는 "모든 적을 죽여라"고 명령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 점이 법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메디나 자신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7. 반응과 영향

1969년 시모어 허시의 특종 보도로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미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으며,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6]

미국 정부는 진상규명에 나섰고,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총 26명의 군인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캘리 중위만이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상급 지휘관들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 후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 사면되었다.[6]

이러한 판결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하며 그의 행동을 애국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전의 잔혹성과 비윤리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다음은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에 나오는 당시 학살 가담 군인 폴 메들로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 사건은 여러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 1971년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나이라이 참전 용사들과의 인터뷰''는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 1975년 스탠리 크레이머와 리 버나드는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심판: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을 감독했다.
  • 1989년 5월 2일 영국의 방송국 요크셔 텔레비전에서 케빈 심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이라이에서의 네 시간''을 방영했다.
  • 1994년 CBS의 ''60분''에서 ''나이라이 재방문''이라는 비디오 영화가 방영되었다.
  • 2008년 3월 15일 BBC가 라디오 4와 BBC 월드 서비스에서 영어[186]와 베트남어[187]로 ''나이라이 테이프''[185]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 2010년 4월 26일 미국 PBS가 자사의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시리즈의 일환으로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나이라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 2010년 12월 10일 이탈리아 프로듀서 지아니 파올루치가 파올로 베르톨라 감독, 미국 배우 보 밸린저가 캘리 역을 맡은 ''나이라이 포(My Lai Four)''[189]라는 영화를 개봉했다.
  • 켄 번스의 2017년 다큐멘터리 시리즈 ''베트남 전쟁''의 8화는 이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 2018년 크리스토프 펠더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이라이 인사이드''가 개봉되었다.[191]

7. 1. 미국 내 반전 여론 확산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가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하면서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216] 이로 인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썬머이(Sơn Mỹ) 작전, 1968년 3월 16일


미국 정부는 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 가담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 결과 총 26명의 군인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었다.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 후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 사면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미라이 학살 7개월 전,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방부 감찰관은 남베트남에서 자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잔혹 행위에 대한 언론 보도를 조사하기도 했다. 1967년 8월, 200페이지 분량의 "남베트남에서 미국 군대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잔혹 행위" 보고서가 완성되었다.[42]

로널드 L. 라이든하우어는 1969년 3월 30명의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핑크빌" 사건의 경위를 조사해 줄 것을 간청했다.[78][75]

1969년 11월경, 로널드 해벌리는 지역 신문과 『라이프』지에 사진을 제공했다. 같은 해 12월, 시모어 허시가 잡지 『뉴요커』에서 진상을 보도했고, 『라이프』지의 보도 등을 통해 이 사건은 미국 군사 역사에 남을 대학살 사건으로 드러났다. 허시의 기사는 “My Lai 4: A Report on the Massacre and its Aftermath영어”으로 정리되어 1970년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는 같은 해 오다 마코토에 의해 『손미-미라이 제4지구에서의 학살과 그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일본에도 알려졌다.

이 학살 사건은 현장에 있던 여러 미국 군인들로부터 군 상층부에 보고되었지만, 미국 여론을 반전 운동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이유로 군 상층부는 사건을 은폐했다.

7. 2. 국제 사회의 비난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가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하면서,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국제 사회는 이 사건에 대해 크게 비난했으며, 미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68]

미국 정부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 결과 총 26명의 군인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었다.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캘리 중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차례 감형을 받았고,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후 사면됐다.[68]

이와는 별개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은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다음은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에 나오는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 1971년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나이라이 참전 용사들과의 인터뷰''는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 1975년 스탠리 크레이머와 리 버나드는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심판: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을 감독했다.
  • 1989년 5월 2일 영국의 방송국 요크셔 텔레비전에서 케빈 심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이라이에서의 네 시간''을 방영했다.
  • 1994년 CBS의 ''60분''에서 ''나이라이 재방문''이라는 비디오 영화가 방영되었다.
  • 2008년 3월 15일 BBC가 라디오 4와 BBC 월드 서비스에서 영어[186]와 베트남어[187]로 ''나이라이 테이프''[185]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 2010년 4월 26일 미국 PBS가 자사의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시리즈의 일환으로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나이라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 2010년 12월 10일 이탈리아 프로듀서 지아니 파올루치가 파올로 베르톨라 감독, 미국 배우 보 밸린저가 캘리 역을 맡은 ''나이라이 포(My Lai Four)''[189]라는 영화를 개봉했다.
  • 켄 번스의 2017년 다큐멘터리 시리즈 ''베트남 전쟁''의 8화는 이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 2018년 크리스토프 펠더 감독의 다큐멘터리 ''나이라이 인사이드''가 개봉되었다.[191]

7. 3. 베트남전의 정당성 훼손

미라이 학살은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의 특종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12] 미국 정부는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 가담자들을 재판에 회부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윌리엄 캘리 중위뿐이었다.[12] 상급 명령권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캘리 중위조차도 가택 연금 3년 반 만에 사면되었다.[12]

이 사건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많은 미국인들은 캘리 중위를 옹호하고 그의 행동을 애국으로 정당화했지만, 학살은 베트남전의 잔혹성과 비윤리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8화에서는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폴 메들로의 인터뷰를 통해, 명령에 따라 민간인, 여자, 아이들, 심지어 아기까지 살해했음을 증언하며, 그 행위가 당시에는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자신을 괴롭혔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2]

미군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도착했다. 1968년 1월 테트 공세 이후 꽝응아이성 썬머이(Sơn Mỹ) 마을에 베트콩 제48지방군 부대가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6][7] 썬머이(Sơn Mỹ)는 바탕안 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베트콩의 거점이었다.[7]

미군은 썬머이(Sơn Mỹ)에 대한 탐색 및 파괴 작전을 계획했고, 태스크포스 바커(TF Barker)가 이 작전에 배치되었다.[9] 작전 지역은 머스케타인 AO[8]라는 코드명을 사용했으며, "핑크빌(Pinkville)"이라고도 불렸다.[10][11]

공격 전날, 찰리 중대 지휘관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콩이나 베트콩 동조자일 것이라고 말했다.[16] 그는 "모두 베트콩이다. 가서 그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했으며,[18] "걷거나, 기어 다니거나, 으르렁거리는" 마을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19] 찰리 중대의 소총병 바르나도 심슨은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민간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지시받은 대로 했다"고 증언했다.[21][22]

8. 관련자들

미라이 학살에는 제11여단 소속 제23사단 찰리 중대와 이들을 지원한 헬기 승무원들이 관련되어 있다.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도착한 찰리 중대는 베트남에서 처음 3개월 동안 베트남 인민군이나 베트콩(VC) 부대와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지만, 지뢰 등으로 인해 3월 중순까지 2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6]

1968년 1월 테트 공세 기간 동안 베트콩 제48지방군 부대가 꽝응아이에서 공격을 가했고, 미군 정보당국은 이들이 꽝응아이성의 썬머이(Sơn Mỹ) 마을에 은신하고 있다고 추정했다.[7] 이에 따라 제11여단의 임시 부대인 태스크포스 바커(TF Barker)가 썬머이 마을 지역에 대한 탐색 및 파괴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8. 1. 장교

태스크포스 바커(TF Barker)는 제11여단의 임시 부대로, 1968년 1월에 편성되어 미라이 학살 당시 작전을 수행했다. 이 부대는 프랭크 A. 바커 중령이 지휘했으며, 찰리 중대를 포함한 3개 소총 중대로 구성되었다. 썬머이(Sơn Mỹ) 마을은 TF 바커의 작전 지역에 포함되었다.[8]

바커 중령은 1968년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썬머이 마을 지역에 숨어 있다고 추정되는 베트콩 제48대대의 잔여 세력을 공격하고 제압할 계획을 세웠다. 공격에 앞서 오란 K. 헨더슨 대령(제11여단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적극적으로 진입하여 적과 근접전을 벌이고 완전히 제거하라"고 촉구했다.[14] 바커 중령은 제1대대 지휘관들에게 집을 태우고 가축을 죽이며 식량을 파괴하고 우물을 파괴하거나 독을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15]

공격 전날 찰리 중대 브리핑에서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부하들에게 썬머이 마을의 거의 모든 민간 주민들이 오전 7시까지 시장으로 떠났을 것이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콩이나 베트콩 동조자일 것이라고 말했다.[16] 그는 명령에 여성과 어린이의 살해가 포함되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당시 참석자들은 메디나의 답변에 대해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 소대장을 포함한 일부는 자신들이 이해한 명령은 모든 베트콩과 북베트남 전투원과 "용의자"(여성과 어린이, 모든 동물 포함)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며 우물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증언했다.[17] 그는 "모두 베트콩이다. 가서 그들을 제거하라"고 말했으며, "내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로부터 도망치거나, 숨거나, 적처럼 보이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남자가 도망치면 쏘고, 심지어 소총을 든 여자라도 도망치면 쏘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18]

캘리의 재판에서 한 변호인 증인은 메디나가 "걷거나, 기어 다니거나, 으르렁거리는" 마을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것을 기억한다고 증언했다.[19]

8. 2. 병사

제23사단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도착하여 1968년 3월까지 활동했다. 찰리 중대는 베트남에서 처음 3개월 동안 베트남 인민군이나 베트콩(VC) 부대와 직접 접촉하지 않았지만, 지뢰나 폭발물로 인해 3월 중순까지 2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6]

공격 전날, 찰리 중대 브리핑에서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부하들에게 썬머이(Sơn Mỹ) 마을의 거의 모든 민간 주민들이 오전 7시까지 시장으로 떠났을 것이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콩이나 베트콩 동조자일 것이라고 말했다.[16] 메디나 대위는 명령에 여성과 어린이의 살해가 포함되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당시 참석자들은 그의 답변에 대해 서로 다르게 진술했다. 소대장을 포함한 일부는 자신들이 이해한 명령은 모든 베트콩과 북베트남 전투원과 "용의자"(여성과 어린이, 모든 동물 포함)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며 우물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증언했다.[17] 그는 "모두 베트콩이다. 가서 그들을 제거하라"고 말했으며, "내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로부터 도망치거나, 숨거나, 적처럼 보이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남자가 도망치면 쏘고, 심지어 소총을 든 여자라도 도망치면 쏘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18] 캘리의 재판에서 한 변호인 증인은 메디나가 "걷거나, 기어 다니거나, 으르렁거리는" 마을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것을 기억한다고 증언했다.[19]

찰리 중대는 제1소대가 선봉을 서서 썬머이(Sơn Mỹ) 마을에 진입하여 적을 공격하고 몰아낼 예정이었다. 이 지역은 베트남 전쟁의 자유사격구역으로 지정되어 미군은 민간인이나 비전투원의 생명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인구 밀집 지역에 포병과 공습을 사용할 수 있었다.[20] 찰리 중대의 소총병 바르나도 심슨은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민간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지시받은 대로 했다"고 말했다.[21][22]

피어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미 정부는 사건 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최소 20명의 베트남 여성과 소녀들이 미라이 대학살 당시 강간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 피해자들의 연령은 10세에서 45세 사이였으며, 9명은 18세 미만이었다. 성폭행에는 집단 강간과 성고문이 포함되었다.[46] 미군 병사 중 강간 혐의로 기소된 자는 없었다. 시모어 허시가 보도한 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 여성은 자녀들이 미군 병사들에게 살해당한 후 강간을 당했다. 또 다른 베트남 주민은 병사들이 13세 소녀를 강간하는 것을 목격했다.[46]

미 육군 준위 휴 톰슨은 헬리콥터 조종사로, 지상군에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던 중 사망자와 부상당한 민간인들을 목격했다.[47] 톰슨과 그의 조종사들은 웅덩이 옆에 헬리콥터를 착륙시켰는데, 그곳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생존자들의 움직임이 보였다.[47] 톰슨은 그곳에서 만난 제1소대 데이비드 미첼 병장에게 사람들을 웅덩이에서 꺼내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 병장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답했다. 톰슨은 윌리엄 캘리 중위와 이야기를 나눴고, 캘리 중위는 자신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헬리콥터가 이륙하자 톰슨은 미첼이 웅덩이를 향해 발포하는 것을 목격했다.[47]

톰슨과 그의 조종사들은 메디나가 무장하지 않은 여성을 발로 차고 근접 거리에서 총으로 쏘는 것을 목격했다. 메디나는 나중에 그 여성이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48] 그 후 톰슨은 지상 인원이 접근하는 벙커에 있는 민간인들을 보았다. 톰슨은 착륙하여 자신의 조종사들에게 만약 자신이 민간인들을 벙커에서 꺼내려고 하는 동안 병사들이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면 병사들에게 사격하라고 말했다.[47] 톰슨은 벙커에서 12~16명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밖으로 나오게 한 후 헬리콥터로 안내했으며, 두 그룹으로 나누어 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함께 있었다.[47]

미라이로 돌아온 톰슨과 다른 항공대원들은 여러 무리의 시체들을 발견했다.[49] 웅덩이에서 생존자들을 발견한 톰슨은 다시 착륙했다. 병장(Specialist 4) 글렌 안드레오타는 웅덩이에 들어가 피투성이였지만 다행히 무사한 네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돌아왔고, 그 아이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되었다.[47]

톰슨은 자신의 중대장인 프레드릭 W. 와트케 소령에게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보고했다. 톰슨의 진술은 다른 헬리콥터 조종사와 항공대원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51]

미라이에서의 행동으로 톰슨은 미국 십자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수여받았고, 그의 대원인 글렌 안드레오타와 로렌스 콜번은 브론즈스타 메달(Bronze Star)을 수여받았다. 글렌 안드레오타는 1968년 4월 8일 베트남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사후에 메달을 받았다.[52] 톰슨은 자신의 메달을 버렸다.[54][55] 1998년 3월, 헬리콥터 조종사들의 메달은 솔저 메달(Soldier's Medal)로 대체되었다. 메달 표창장에는 "미군에 의한 미라이에서의 비전투원 불법 학살 중 적어도 10명의 베트남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는 임무 수행 중 의무 이상의 영웅적인 행위"라고 적혀 있다.[57]

8. 3. 헬기 승무원

휴 톰슨 주니어 준위는 작전 지역을 비행하던 중 노인, 여성, 아동으로 구성된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저항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비무장 여성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228] 톰슨 준위는 즉시 무선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착륙하여 부상자와 시체를 헬기에 싣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1소대장 켈리 소위는 이를 거부했다. 톰슨 준위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여성과 아이들을 발견하고 2소대장에게 발포 시 응사하겠다고 경고한 뒤, 이들을 헬기에 태웠다. 톰슨 준위와 동료들은 다시 미라이에 돌아와 시체 속에서 4살 미만의 소년을 구출했다.[228]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전쟁 당시 글렌 안드레오타 4급 특기병이 기장을 맡고, 휴 톰프슨 주니어 준사관이 조종하고 로렌스 콜번 4급 특기병이 사수를 맡은 OH-23G 정찰 헬리콥터가 마을 상공을 지나가다가 다수의 사망자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목격하였다. 톰프슨 준사관은 상관에게 보고하고 구조 헬기 파견을 요청하여 생존자를 구출하였으며, 더 이상 폭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C중대를 위협하였다.[214] 1994년 미국은 톰슨에게 장병의 훈장을 수여하였다.[228]

9. 대중 매체의 보도와 묘사

미라이 학살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뤄졌다.

1969년 9월 5일, 윌리엄 캘리 중위에 대한 기소 관련 보도자료가 발표된 후, 미라이 학살은 미국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다.[162] 1969년 9월 10일, NBC는 ''헌틀리-브링클리 보고서''에서 남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내용을 보도했다.[163]

로널드 라이든하우어는 육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언론에 정보를 공개했다. 그는 ''피닉스 리퍼블릭''의 기자 벤 콜에게 접근했지만, 이 기사는 다뤄지지 않았다. ''콜럼버스 인콰이어러''의 찰스 블랙도 기사를 보류했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도 제보를 받았지만 보도하지 않았다.[163]

1969년 10월, 시모어 허시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미라이 학살을 폭로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라이프''와 ''룩'' 잡지는 기사를 거절했지만, ''디스패치 뉴스 서비스''를 통해 미국 주요 신문 50곳에 기사가 보내졌고, 그중 30곳이 기사를 게재했다.[164] ''뉴욕 타임스'' 기자 헨리 캠은 남베트남에서 미라이 학살 생존자들을 찾아내 민간인 사망자 수를 567명으로 추산했다.[165]

벤 콜은 미라이 학살의 진실을 밝힌 헬리콥터 사수이자 육군 내부 고발자인 로널드 라이든하우어에 대한 기사를 발표했다. 로널드 헤이벌리는 ''플레인 딜러''의 조 에스터하스에게 연락했고, ''플레인 딜러''는 1969년 11월 20일 노인, 여성, 어린이들의 시체 사진을 게재했다.[38] 1969년 11월 28일 ''타임''과 1969년 12월 5일 ''라이프''에 헤이벌리의 사진이 포함된 기사가 실리면서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공개 논쟁의 중심에 섰다.[166][167]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정치 평론가 리처드 L. 스트라우트는 "미국 언론의 자체 검열로 인해 라이덴하워의 폭로가 1년 동안 막혔다"고 말했다.[168] 이후 미라이 학살 관련 인터뷰와 기사가 미국과 국제 언론에 정기적으로 실렸다.[169][44]

ABC 텔레비전 뉴스 앵커맨 프랭크 레이놀즈는 이 학살이 "전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미국이 베트남 참전을 종식해야 한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고 말했다.[170]

미라이 학살과 윌리엄 캘리 중위에 관한 100곡 이상의 노래가 발표되었다.[171] 캘리 중위를 옹호하는 노래가 반대하는 노래보다 많았지만, 전후 시대의 모든 노래는 캘리 중위와 그의 소대의 행동을 비판했다.[172]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노래는 테리 넬슨의 "중위 캘리의 전투 찬가"였다.[173]

1971년, 작곡가 아놀드 로스너는 "미라이의 비가"라는 교향곡을 작곡했다.[176] 2016년에는 미라이 학살에 관한 오페라 "미라이"가 공연되었다.[176]

1971년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나이라이 참전 용사들과의 인터뷰''는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181] 1975년에는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심판: 윌리엄 캘리 중위의 군사 재판''이 제작되었다.[182]

1989년, 영국 요크셔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나이라이에서의 네 시간''을 방영했고, 미국 PBS에서 ''나이라이를 기억하라''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183] 1994년 CBS의 ''60분''에서 ''나이라이 재방문''이라는 비디오 영화가 방영되었다.[184]

2008년, BBC는 ''나이라이 테이프''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185] 2010년, 미국 PBS는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나이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188] 2010년, 이탈리아에서 영화 ''나이라이 포''가 개봉되었다.[189]

켄 번스의 2017년 다큐멘터리 시리즈 ''베트남 전쟁''의 8화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2018년에는 다큐멘터리 ''나이라이 인사이드''가 개봉되었다.[191] 뮤지컬 ''중위''는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록 오페라로, 미라이 대학살과 군사 재판을 다룬다.[192]

미라이 학살은 로널드 헤이벌리를 포함한 미국 육군 병사들에 의해 카메라에 담겼다.[193] 헤이벌리는 학살 당시 촬영했던 사진 여러 장을 파기했다고 밝혔다.[194][195] 헤이벌리의 사진을 사용한 ''아기들(And babies)'' 포스터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데 성공적인 포스터였다.[196]

3소대의 존 헨리 스마일은 미라이의 항공 사진 등을 촬영했다.[197][198] 이 사진들은 "미라이 사건에 대한 예비 조사에 대한 육군부 보고서"에 포함되었다.[199]

10. 역사적 기념물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40주년을 맞아 사건 현장에 세워진 기념관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생존자들과 전 미국 군인들, 지역 주민들이 참석했다.[214] 윌리엄 캘리는 가석방 후 언론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지만, 2009년 8월 19일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봉사 단체의 오찬에 참석하여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219][220]

학살 50주년인 2018년 3월 16일, 썬미(Sơn Mỹ) 마을 터에 건설된 틴케 마을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귀환 미군 단체 관계자 등 약 1000명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꽝응아이성 관계자는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지만,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222] 평화 기념 공원 건설 계획도 발표되었다.[223]

10. 1. 호치민시 전쟁유물박물관

전쟁 유물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로널드 헤이벌리(Ronald Haeberle)가 찍은 학살 사진을 확대해서 보고 있다.


호찌민시의 전쟁유물박물관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관련 전시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호찌민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으로, 매년 약 5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201][202] 미라이 학살 당시 종군기자였던 로널드 헤이벌리가 찍은 사진 여러 장이 다른 유물과 함께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학살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10. 2. 손미 기념관

손미(Sơn Mỹ) 학살 기념비, 베트남


손미 기념관은 꽝응아이성 손미(Sơn Mỹ) 마을의 학살 현장에 위치하며, 학살 당시의 잔해를 포함하고 있다.[203][204] 기념관 입구에는 검은 대리석 명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미군에 의해 희생된 50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중에는 임산부 17명과 13세 미만 어린이 210명이 포함되어 있다.[205][206]

기념관 내부에는 로널드 헤이벌리(Ronald Haeberle)가 촬영한 학살 당시의 사진들이 확대되어 전시되어 있다.[207] 이 사진들은 역광 처리되어 더욱 인상적이며, 중앙 벽면에는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둘러싸고 사격하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208]

기념관 부지 중앙에는 큰 석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조각상 오른쪽 아래의 두 아이는 헤이벌리(Haeberle)의 사진 중 "오솔길의 두 아이"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본떠 만든 것이다.[209]

기념관은 학살을 최초로 폭로한 로널드 라이덴하워(Ronald Ridenhour)와 마을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한 휴 톰슨 주니어(Hugh Thompson Jr.), 로렌스 콜번(Lawrence Colburn) 등 미국 영웅들을 기리고 있다.[205]

2008년 3월 16일, 사건 발생 40주년을 맞아 기념관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생존자, 전직 미군, 지역 주민들이 참석했다.[214] 2018년 3월 16일, 학살 50주년 추도식에는 지역 주민과 귀환 미군 단체 관계자 등 약 1000명이 참석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222] 꽝응아이성 관계자는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지만,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222] 평화 기념 공원 건설 계획도 발표되었다.[223]

판 탄 콩(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당시 10세)은 틴케 마을 기념공원 박물관장으로 희생자 추모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2009년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의 사과에 대해 너무 늦었지만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221]

10. 3. 미라이 평화 공원

199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30주년을 맞아 학살 현장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미라이 평화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에는 헬리콥터 구조대원이었던 휴 톰슨 주니어와 로렌스 콜번을 포함한 참전 용사들이 참석했다. 평화공원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참전 용사 마이크 보엠[211]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과거를 잊을 수 없지만, 분노와 증오 속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이 평화 공원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위한 푸르고 굴곡진 살아있는 기념비를 조성했습니다."[113]

2001년 3월 16일, 꽝응아이성 여성연합, 매디슨 퀘이커 자선단체, 베트남 정부의 공동 사업으로 미라이 평화공원이 헌정되었다.[212] 2008년 3월 16일, 사건 발생 40년 후에는 사건 현장 터에 세워진 기념관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사건 생존자들과 전 미국 군인들, 지역 주민들이 참석했다.[214]

2018년 3월 16일, 학살 50년 후에는 송미 마을 터에 건설된 틴케 마을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귀환 미군 단체 관계자 등 약 1000명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222] 꽝응아이성 관계자는 “돌아가신 분들을 잊은 적은 없지만, 마을은 재건되었다.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222] 평화 기념 공원을 중심으로 건설하는 계획도 발표되었다.[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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